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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 형님께

HIT 864 / 정은실 / 2007-10-14



형님.

 

어제 하루 내내 많이 바쁘셨는데, 세상에서 감자탕이 제일 맛있다고 하는 찬빈이와 서웅이 때문에 저녁까지도 바쁘셨지요? 배불리 먹고도 남은 감자탕을 큰 냄비에 싸주기까지 하셔서 오늘 낮에 또 한 끼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제 밭에서 모두 솎아내어 버무려주신 열무김치는 새콤하게 익혀서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그냥 바깥에 뒀습니다. 호박은 내일 된장찌개에 넣어 먹을까 싶고, 그냥 보기만 해도 단맛이 느껴지는 단호박은 나중에 쪄먹으려고 그늘진 곳에 잘 두었습니다.

 

아, 사건이 하나 있었네요. 첫 수확하셨다며 한 포기 주신 배추를 씻다보니 아기 달팽이가 붙어있었어요. 평소처럼 배춧잎 위에 얹어서 정원으로 던져놓을까 하다가 이 날씨에 곧 죽을 것 같아서, 엄청 고민하다가 한번 키워보려고 배춧잎 위에 얹어서 축축한 그릇에 담고 상자로 햇볕을 가려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흙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고 해서 습지생물을 키우는 바닥재도 사다가 깔아주었습니다. 원래 제가 집안에 식물 외에는 뭘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제 비도 잘 내리지 않는 추운 날씨에 금방 죽을 것이 분명한 생명을 밖으로 던져버릴 수가 없네요. 아직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지만 한 번 잘 키워보겠습니다.

 

늘 찾아뵐 때마다 정성스럽게 챙겨주시는 형님을 뵙고 오면 꼭 돌아가신 어머님을 뵙고 오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어머님은 저희 곁을 일찍 떠나셨지만 형님은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늘 이렇게 찾아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지라 이번에 뵌 형님 모습이 지난 명절 때보다 훨씬 건강해보이셔서 좋았습니다. 몸도 가벼워지셨고 표정도 훨씬 더 밝아지셨어요. 체중조절하려고 시작하신 운동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운동만이 아니라 아이들 도자기 체험 지도를 하시면서 몸은 바빠도 생활에 활력이 생기신 것 때문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아이들이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것을 봐주는 것이 무척 재미가 있는데 거기에 보수까지 받으니 더 좋다는 형님 말씀이 귀에 남습니다. 아마도 형님은 참 좋은 선생님이실 겁니다.

 

형님, 10년 후쯤 형님 회갑연은 정말 개인전시회를 해보시면 어떨까요? 몇 년 전 함께 그림 공부하시던 분들과 같이 조촐하게 여신 전시회 때 형님, 화가로서 참 잘 어울리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화가로서의 창조성은 없다.’고 어제 말씀하셨지요? 제가 그림을 잘 볼 줄은 모르지만, 그림이 기술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손을 통해서 그림이 그려져 나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열정이 있고, 참 따뜻하고 섬세하고 깊은 마음을 가진 형님은 그런 형님 같은 그림을 그려내실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에 Anna Mary Robertson Moses라는 자신의 본명보다 ‘그랜마 모제스’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는 미국의 화가가 있습니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모제스 할머니는 평생을 농부의 아내로 살았고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는데 70세가 넘어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셨다고 합니다. 100세에 모제스 할머니가 그린 그림을 보면 참 얼마나 따뜻한 느낌인지, 그것이 그저 기술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저 같은 문외한이 봐도 느낄 수 있더군요.

 

형님! 11월에 하실 것 같다는 집 보수 공사 때에는 조용하게 그림 그리실 수 있도록 화실도 하나 만드시면 참 좋겠습니다. 양평의 아름다운 산, 나무, 꽃, 물,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형님 화폭에 담기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형님이 화실을 만드시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지만 예쁜 화구 하나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형님. 내일쯤이면 열무김치가 맛있게 익을까요? 열무 꺼낼 때마다 제가 형님 생각할 겁니다. 차가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 10년 후 형님의 개인전을 떠올려보며, 평촌에서 찬빈 서웅 엄마 은실 드림.

 

 

 

추신 : 참, 어제 11시 반쯤 형님 댁을 나서서 조금 오다가 칠흑 같은 양평 하늘의 별빛이 하도 고와서, 자동차 라이트 모두 다 끄고 온 식구가 한참 별구경을 했습니다. 그래도 새벽 1시 좀 넘어서 잘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