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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자신의 안전지대가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HIT 1082 / 최학수 / 2007-11-16



레인보우 파티의 기획자인 이기찬님의 글을 그의 블로그에서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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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07년 11월 14일(수). 레인보우 파티 시즌 1이 시작된 어제는 제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습니다. 후기를 써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지난 1년 반의 여정에 대한 소회를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야 제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것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돌이켜 보니 글을 통해서는 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할 얘기가 없었던 것인지, 들려드릴 만한 자랑스럽거나 교훈이 담긴 일들이 없었던 것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안전지대와의 결별


10년 이상 몸담았던 대기업(GS홈쇼핑&CJ시스템즈)이라는 온실은 저에게 있어 꽤 오랫동안 튼튼한 안전지대(지금에 와서는 또 하나의 매트릭스였다는 생각이 들지만)였습니다. 누구나 느끼는 직장생활에서의 스트레스로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막상 그 곳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안전지대에서 보냈습니다.


직장생활 마지막 몇 개월은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날들이었고, 그간에 누적된 안전지대에서의 이탈이 가져오는 공포와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로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생각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었죠. (저의 익스트림 낙관주의만을 경험해 오신 분들은 제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믿지를 못하시더군요)


그렇게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2006년 초에 오랫동안 저를 보살펴 분 상사의 배려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1기 연구원이었던 오병곤님이 팀장으로 있던 부서로 의도하지 않은 낙하산(?)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병곤님 입장에서야 결코 달가울리 없는 인사였것만 첫 만남부터 그는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더군요.


“일단, 업무는 신경쓰지 마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배려할 테니 마음부터 추스리기를 바란다.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아주 힘들 때가 있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시 힘을 낼 수가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서 잘 안다.”


오병곤님의 배려로 다소 마음의 안정은 찾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고민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서대원 선생님이 잠깐 소개한 일화처럼 오병곤님이 책 한권을 저에게 권해 주었습니다. 구본형 선생님의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 말입니다. 처음으로 구본형 선생님을 인식하게 된 계기였고 곧 선생님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2개월간 변경연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대부분의 글을 샅샅이 뒤져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책보다는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 속에서 방황하고 힘들어 하던 저에게 너무나도 필요했던 중요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들은 현실에 좌절하기 보다 지금의 자신에게 분노하며 떨쳐 일어나, 잃어버렸던 꿈을 아름다운 풍광으로 되살려 내고, 서로를 격려하며 평범함 속에서 자신을 위대하게 일으켜 세우는 순간을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땀 흘리며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왜 힘들어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그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안전지대로만 여겨왔던 직장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저만의 자기다움이 억눌려 왔다는 것을,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고 잘 할 수도 없었으며 자신감까지 잃었다는 것을. 이렇게 마흔이라는 나이를 맞이하게 되면 더 큰 모욕을 당할 것이고 새로운 인생으로 뛰어들 용기마저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나답게 살겠노라고. 그리고 이 순간부터 결코 과거의 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 두가지 다짐외에는 그 어떤 명확한 계획도 없이 사표를 냈고 저를 걱정하는 많은 분들은 저를 말렸습니다. 심지어 제가 이런 결단을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오병곤님까지 말입니다. 물론 말리는 이유는 달라습니다만..


그거 아세요? 팀장을 비롯한 윗 분들과 회사에서 사표가 공식적으로 받아 들여지기까지 여전히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하자고 싹싹 빌까 하는 나약한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막상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마법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모든 종류의 미련과 불안들이 사라져 버리더군요.


‘삶은 자신의 안전지대가 끝나는데서 시작된다’라는 글귀의 의미를 그제서야 저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모피어스가 내민 위험스러워 보이는 ‘빨간약’을 선택하고 나서야 본래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 것처럼 저 역시 저만의 안전지대와 결별하고 나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재능세공사의 탄생


2기 연구원 오성민님과 NLP 석세스 연구소에서의 만남을 통해 타고난 저의 긍정성을 되찾을 수 있었고, 오병곤님이 팀내에서 주도했던 북세미나를 통해 접하게 된 StrengthFinder(갤럽에서 개발한 재능검사 도구)로 또 다른 저의 재능 네 가지를 확인하게 되었죠. 그리고 2기 연구원 몽산포 모임, 영화 ‘제리 멕과이어’의 라스트 신, StrengthFinder라는 도구 등에서 영감을 받아 운 좋게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보다 빨리 찾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타고난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제가 새롭게 만들어 내고 이름 붙인 ‘재능세공사’의 미션이 되었습니다. 단지 ‘스스로 정의한 개념’ 하나로 시작된 이 일은 제 블로그를 통해 우연히 그런 도움을 필요로 했던 이들과의 만남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뼈대가 만들어지고 저만의 기질 및 재능과 맞물리면서 서서히 살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직업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실험적 시도를 필요로 하겠지만 제가 평생해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꿈벗들과 구본형 선생님과의 특별한 만남


2006년 4월 말에 제가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꿈벗 8기 모임이 인원수 부족으로 연기되면서 저는 회사를 떠나면서 친구가 된 병곤의 제안으로 꿈벗 7기(성렬형님,혁재,아름,영훈,병곤,성은,용균)의 부산 뒷풀이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바로 그 곳에서 아주 멀게만 생각해 왔던 구본형 선생님과 첫 만남이 있었고 더불어 변경연 커뮤니티의 원로들이자 빼놓을 수 없는 깍두기(?) 3인방(박노진,신재동,홍승완)까지 알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됩니다.


병곤의 이야기와 변경연 홈페이지에서 간접적으로만 들어왔던 창조적 부적응자들의 노는(?) 모습은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나이의 사람들이 저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며 꿈을 이야기하고 추억의 노래를 부르고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포옹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구본형 선생님께 이렇게 표현했었죠.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다 모으셨습니까? 선생님은 정말 성공하셨네요.”


그들의 어울림을 보면서 느꼈던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말씀드렸던 것인데 선생님에게는 매우 인상적인 말이었나 봅니다. 한동안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 마다 그때 일을 언급하시며 즐거워 하셨으니까요. 그런 선생님의 반응에 저 또한 내심 흐뭇해 하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있었던 상반기 꿈벗 전체모임에 가족들과 함께 참가해서 부산모임 확장판을 실감나게 경험하게 되었죠. 거기서 꽤 많은 꿈벗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저만의 자기다움을 발현하며 꿈벗들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를 계기로 꿈벗도 아닌 것이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 오프모임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연구원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고비와 자극받기 여행


꿈벗 7기들과는 안성 모임을 한번 더 가졌고 부산에서 만나지 못했던 안정언님과 이경우님과도 인연을 맺으면서 7.5기라는 별호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구본형 선생님도 참석하셨는데 부산모임 이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회사를 그만둔 이후 제가 보낸 시간들이 매우 실망스러웠음을 확인하고는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이후에 첫번째 고비가 찾아온 것이죠.


과거와 단절하고 나답게 사는 재미에 여념이 없었던 몇 개월이 지날 무렵, 완연하게 긴장이 풀리고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제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 보니 아무것도 나아지거나 발전한 것이 보이지 않더군요.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엄습하더군요. 밖으로 크게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제 심경이 느껴졌는지 승완이가 하루는 저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처음 내가 형을 만났을 때는 굉장히 열정도 느껴지고 보기가 좋았는데, 최근에는 에너지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저를 아마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병곤이도 쉽지 않은 고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단지 나답게 살겠다거나 과거로 회귀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변화를 담보할 수 없으며, 너의 일상을 바꾸는 성실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자주 해주었죠. 그때 마침 김달국님의 세번째 저서 출판기념회가 포항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저는 아내에게 며칠간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발전적 자극을 기대하며 포항으로 내려 갔습니다.


꿈벗 모임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김달국님은 구본형 선생님이 그 당시 연구원들이나 꿈벗들이 있는 자리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자기변화에 성공한 모범사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당팔이라는 닉네임에서 느끼는 구수함과는 사뭇 다른 성과를 만들어 가는 그분만의 노하우가 궁금해졌습니다.


김달국님을 한번이라도 접한 분들은 모두 느끼시겠지만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찰나지간에 백년지기와 같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어당팔님만의 타고난 ‘어색함 무력화’ 재능 덕분에 무거운 마음에서 잠시 벗어날 여유가 생겼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형수님의 남편에 대한 티나지 않는 신뢰, 이미 3권의 책을 잉태한 중견저자다운 소담스러운 서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한다는 집 뒷편의 조그만 공간 등에서 김달국님만의 일상의 황홀을 만들어 가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초아 서대원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꿈벗이나 연구원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무언가 구본형 선생님과는 또 다른 의미의 내공이 느껴지는 삶의 고수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초아 선생님에게서 아호를 받게 되었는데 처음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구만”


그 짧은 말씀과 함께 亨典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셨습니다. ‘인생 전체를 힘차게 살아라’라는 뜻이 담겨 있었죠. 정곡을 찌르는 아호에 깊이 감사하면서도 더 많은 말씀을 듣고 싶어 뒷풀이 자리에서 기회를 엿보았는데 쉽사리 기회를 주시지는 않더군요.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저를 향해 한마디 하셨는데 기대와는 달리 충격적인 한마디를 하시더군요.


“자네, 뭐 원아이드잭인가 이런 닉네임을 쓰던데 그게 무슨 뜻인가?” (나름대로의 뜻을 설명드렸더니) “자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하게 말하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이기적인 마음인기라.”


그 당시에는 매우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평가를 들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루기가 어렵더군요. 귀자의 제안으로 경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면서도 내내 초아 선생님의 말씀이 머리속에서 떠나지를 않더군요. 그러다가 문득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어렴풋이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와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나 집단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바람이 담겨져 있던 ‘원아이드잭’이라는 닉네임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제 스스로가 갇혀 어느덧 저의 자기다움을 발현하고 꿈을 이루어 나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음을 초아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원아이드잭이라는 닉네임을 버리고 본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원잭이라는 애칭은 가끔 사용하지만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꿈벗 10기와의 인연과 3기 연구원 레이스


꿈벗 10기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NLP 석세스 연구소 오프모임에서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오신 분 중에서 자신들도 꿈벗이라며 반갑게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써니님과 한정화님과는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어부 김진철님도 바로 그 자리에 계셨는데 올해 꿈벗 전체모임에서 다시 재회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하고는 이런저런 다양한 채널로 공통점이 많은 분이더군요.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써니님이 꿈벗 10기 뒷풀이 모임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지금은 3기 연구원으로 변신해서 열심히 공부중인 승오, 소라를 비롯해서, 권기록님, 송대광님, 유태성님 등과 꿈벗 7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연을 만들게 되었죠. 꿈벗 기수중에 가장 많은 연구원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해진 10기들이 대거 3기 연구원 레이스에 뛰어 들면서 자연스럽게 저 역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꿈벗도 아닌 것이 칠랄레 팔랄레 변경연 커뮤니티를 휘젖고 다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하나의 집단에 소속되어서 이 커뮤니티에서 계속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책을 내는 것이 필수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구본형 선생님께 말씀해 오시던 부분이 있어서 이를 위한 필수코스로 연구원 응시를 당연히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제가 선택한 길은 3기 연구원 레이스에 참여한 분들을 댓글로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참여하고 싶었던거죠. 초아 선생님도 그 대열에 합류하셨고 20명 중에서 13명이 레이스를 통과했습니다. 저는 마치 제가 연구원이 된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그 레이스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흠뻑 즐겼습니다. (60개의 리뷰를 다 읽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평소의 저 같으면 할 수 없었던 어려운 도전을 해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뜻 깊은 성취 중의 하나로 자랑스럽게 꼽기도 합니다..^^)


13명의 연구원 레이스 통과자들과 심사에 참여했던 선배 연구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구본형 선생님은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기찬아, 너는 왜 연구원에 응시를 하지 않았니?”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 오실 줄은 몰랐기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또 다른 자리에서 선생님은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훨씬 더 진지하게..


첫번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이후에 나름대로 자문해 왔던 바를 솔직히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는 저 역시 연구원에 참여하고 싶지만 연구원 활동과정에서 선생님과 동료들에게 저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날까봐 두려움이 크다. 두번째는 연구원 프로그램이 매우 좋은 프로그램인 것을 알지만 아직은 저만의 방식으로 제가 꿈꾸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가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 같다.”


묵묵히 제 이야기를 들으신 후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혼자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잘못하면 반밖에 이룰 수 없을지도 못한다. 그러나 스스로 더 노력하고 성실히 해 나간다면 더 잘할 수도 있다. 열심히 해라. 너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약해질 때 마다 이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따뜻한 격려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변경사모 함성(서포터즈)의 탄생


3기 연구원 레이스가 끝나고 향인님을 비롯한 몇 몇 꿈벗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향인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장난스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이미 집으로 갈 버스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는 근처의 PC방에서 첫 차가 다닐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치어리더 모집’이라는 글을 써서 올리게 되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와 남해 연구원 모임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글에 소리 없는 눈팅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면서 치어리더단 발족이 장난이 아닌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서포터즈라는 이름으로 그 모임을 4월 13일 발족하게 되었고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닌 함께 성장한다는 모토하에 구성원이 매월 한명씩 강연을 하고 뒷풀이를 하는 형식을 갖추면서 지금의 변경사모 함성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당연히 단장을 참칭하며 지금까지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요..^^ 이제는 명실공히 기존의 변경연 두 커뮤니티 꿈벗, 연구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하나의 커뮤니티가 성장했습니다. (이 역시 제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후에 이루어낸 또 하나의 성취 중에 하나로 꼽힙니다)


레인보우 파티의 시작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2007년 상반기 꿈벗 전체모임이 다가왔습니다. 어느덧 꿈벗 7기가 모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이죠. 7.5기였던 저는 당연히 오병곤 회장의 소집명령에 응해야 했고 나름 중책을 맡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안성 세렌디피티 팬션에서 열린 꿈벗 전체모임의 화합의 장 진행을 맡게 된 저는 오랜만에 오락부장으로 위용을 떨치던 학창시절로 되돌아가 신나게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참석해 주신 분들도 많은 호응을 해주셨구요. 이 일이 훗날 레인보우 파티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죠.


꿈벗 전체모임이 끝나고 몇 주가 흐른 후 구본형 선생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웬지 모를 기대감을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선생님은 몇 년 전부터 구상해 오시던 ‘레인보우 파티’에 대한 히스토리를 들려주시면서 저에게 이 파티를 한번 만들어 보라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평생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고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경제적 기반을 갖출 수 있는 일에 제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부족한 제게 그런 기회를 주셨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게다가 레인보우 파티는 제가 하려고 하는 일과도 너무나 잘 어울려서 즐겁게 준비할 수 있는 컨셉을 가지고 있었고 비즈니스 차원에서도 가능성이 보이는 기획안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직장을 떠난 후 보내왔던 1년 정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지혜로운 파트너와의 만남 그리고 도전


변경사모 함성 모임을 통해 초창기부터 인연을 맺어 왔던 김지혜님은 저와는 또 다른 열정과 자기다움으로 감성코칭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넓은 의미의 동지였습니다. 레인보우 파티에 대한 초기 구상을 시작하던 즈음 우연히 김지혜님과의 만남에서 그 얘기를 꺼냈고 우리는 바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레인보우 파티를 만들 것을 결의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레인보우 파티를 런칭 할 때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자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아지트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획 아이디어를 도출한 후에 다양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변경연 커뮤니티 분들 중에 당장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분들을 우리들 마음대로 지명해서 자칭 ‘레인보우 파티 자문단’으로 위촉하고는 무턱대고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인보우 파티 초기 기획에 참여했던 비즈니스코치 한상진님, 역량개발연구소 정은실님과 꿈벗 최학수님을 필두로, 김용규님, 김유석님 등을 차례로 만나며 다양한 측면에서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강연과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반반씩 들어간 전일제 형식의 ‘레인보우 파티’ 2차 기획안 컨셉을 잡게 되었습니다.


자문단과의 오프라인 공유미팅을 통해 레인보우 파티가 다루어야 할 주제, 적절한 비즈니스 파트너에 확보 및 마케팅 방안, 차별화 된 경쟁력 확보방안 등에 제한 없는 브레인스토밍이 전개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상충될 수도 있는 복합적인 아이디어의 구슬을 꿰어서 보석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졌습니다.


또 한번의 고비 그리고 재도전


한참 탄력을 받던 레인보우 파티 준비는 둘째 아이의 출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처음으로 시도 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튀어 나오는 만만치 않은 난제 등의 장애물을 만나면서 고비를 맞게 됩니다. 차분하게 제 곁을 지켜주었던 파트너 김지혜님의 인내심과 구본형 선생님의 적절한 타이밍에서의 방향 제시가 없었다면 과거의 제가 그랬듯이 또 한번 중요한 길목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잘못을 되풀이 했을지도 모릅니다.


레인보우 파티 시즌 1 런칭을 한달 반을 앞두고 초기에 검토되었던 전일제 형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4시간 정도의 평일 개최를 가능한 빨리 시도하고 이를 토대로 보완해 나가는 것으로 방향을 정하고 나자 우리는 다시 흐름을 되찾았습니다.


세 분의 강연자까지 포함된 두번째 자문단 미팅에서 구체적인 주제와 형식, 홍보 및 마케팅 방안 등이 결정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인 시즌 1 런칭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온라인 포스터를 확정하고 각 채널을 통해 홍보를 시작하자 모든 것이 실전모드로 전환되었고 우리가 할 일은 급속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때부터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더군요.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역시 참여자 모집이었습니다. 기존의 변경연과 관련된 커뮤니티 외에 협력할 곳을 찾아 다녔지만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의 기획내용만을 가지고 처음 만나는 분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역량개발연구소, NLP 석세스 연구소, 한국CEO연구소, 윤코치연구소, 리쿠르트 등에서 도움을 주셨고 그동안 인연을 맺어온 변경연 커뮤니티의 많은 분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세밀한 준비과정에서 김지혜님은 다양한 행사경험을 바탕으로 놀라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120%의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풍부하고 강력한 인맥으로 동영상 제작과 각종 디자인을 도와주실 분들은 물론 행사 당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줄 젊고 패기넘치는 운영요원 11명을 혼자 소싱해 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다 차려진 밥상에 마이크 하나 놓은 것 밖에 없는 셈이죠..^^


레인보우 파티 시즌 1 런칭 그리고 아쉬움


드디어 5개월간의 도전끝에 레인보우 파티 시즌 1이 런칭되기 전날 우리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막상 우리의 도전의 결과를 앞두자 두려움이 밀려 오기도 하고 장미빛 희망이 고개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모든 계획이 그렇듯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확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변명하고 싶어도 확실한 준비 부족이었죠. 특히나 제가 책임을 맡았던 부분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에 대한 냉정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허둥대기만 했죠. 사실 파티 시작을 1시간 정도를 앞둔 시점에는 행사를 제대로 치루어 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김지혜님을 비롯한 진행요원들이 힘을 내기 시작했고 갖가지 문제들이 하나 둘 해결되어 저 역시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아 20분 정도 늦은 7시에 파티는 시작되었습니다. 후회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파티를 끝내는데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보다 40분 정도 지연되어 파티는 끝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수많은 아쉬움이 밀려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첫 행사치고 잘 치루었다고 격려를 해주셨지만 강연을 채 듣지 못하고 자리를 뜨신 참석자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노력했다면 놓치지 않았을 중요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관대한 마음보다 냉정한 질책을 겸허하게 듣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즌에서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잘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그래도 우리는 해냈습니다. 혼자서 도전했다면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지혜로운 파트너 김지혜님께 다시한번 특별한 마음을 담아 감사 드립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를 떠나 개인적으로 안전지대와 결별한 이후에 처음으로 거둔 가시적인 성과라는 점에서 레인보우 파티 시즌 1은 앞으로 열어갈 저의 미래를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징으로 제 가슴에 남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장황하게 지나온 여정을 이야기한 이유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 명확한 계획도 없이 자기다움을 찾아 무모한 여행을 떠나온 저 같은 사람도 시행착오도 많았고 허비한 시간도 여전히 많았지만 자기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성장한다는 모토로 뭉친 변경연 커뮤니티와의 인연을 통해 작지만 의미있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자기답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사례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미 저에게 용기를 주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신 변경연 커뮤니티 분들과 레인보우 파티 시즌 1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한 걸음씩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으로 흐뭇하게 바라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