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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앞에서

HIT 494 / 정은실 / 2008-02-25



오늘 눈이 내렸습니다.

잠시 내리는 봄눈인가 했더니 제법 소복하게 쌓일 정도로 눈이 내렸습니다.

봄을 기다리고 있던 나무들에 다시 하얀 눈꽃이 피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덕분에 운전하는 길이 많이 막혔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을까 살짝 조바심이 일었지만

그래도 눈 덕분에 늦어진 교통흐름이 오늘 짜증스럽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혀서 자주 자주 만나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 때에 느꼈던 경이로움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운전면허를 참 늦게 땄습니다(생각해보니 제가 하는 일들이 다 그리 빠르지가 않습니다).

`자동차가 사는데 꼭 필요하지는 않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차를 사지 않고 버티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회사까지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며,

엄마역할과 주부역할과 학생역할을 동시에 시작해야했던 서른 다섯 살 때에야

기동성을 높이고 시간을 절약해보려고 면허를 따고 차를 사고 바로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늦게서야 시작했던 운전은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운전을 하면서 좋았던 것은 걸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 중의 하나가 신호등과 신호등이 만들어내는 세계였습니다.

걸어다닐 때에는 딱 두 가지 신호등만 보였습니다. 빨간색 신호등과 녹색 신호등.

그런데 운전대에 앉고 나자, 노란색 신호등도 보이고 좌회전 신호등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신호등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차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꺾어야할지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신호등대로만 그대로 움직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찻길.

가야할 때와 멈출 때를 알게 해주는 신호등이 참 편안했습니다.

삶에서도 이렇게 신호등이 켜지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시작하며

과연 이 길이 나의 길이 맞을까를 끝없이 고민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god의 `길`이라는 가요를 그때 참 많이 들으면서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호등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듭니다.

도로에만 신호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우리 삶에도 신호등이 있다는 생각.

우리 마음에도 신호등이 있다는 생각.

 

막힘없이 녹색 등만 받으면서 쾌속 질주를 할 때도 있고,

얼마 가지 못하고 자꾸 빨간불을 받을 때도 있고,

직진을 하려고 했는데 좌회전 신호를 받아버릴 때도 있습니다.

도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결정을 했는데 노란색 등이 마음에 켜질 때가 있습니다.

한 번 더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어떤 제의를 받았지만 빨간색 등이 켜질 때가 있습니다.

답답해하는 대신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면,

그동안 녹색 등으로 바뀔 수도 있고 깨끗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좌회전 직진 동시신호가 떨어질 때처럼 두 가지 선택 모두가 매력적일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도 신호등이 켜집니다.

 

마음에 켜지는 신호등을 알아차리면

내 마음의 지금 상태와 가야할 때와 멈출 때를 좀 더 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눈 내리는 찻길에서 자주 신호등을 보다가, 신호등이 일으켰던 옛생각을 다시 떠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