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개발연구소 로고

`일을 잘해서만이 인정받는 존재라면 나는 슬퍼질거다`

HIT 597 / 최학수 / 2008-03-29



모닝 페이지 까페에 한 친구가 식당에서의 알바 경험을 올렸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일을 잘해서만이 인정받는 존재라면 나는 슬퍼질거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식적인 인간은 이 말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가 잘나든 못났든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하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길가는 사람 대부분이 `예`라고 답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흉악범 마저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 하는가에 이르면 평범한 우리들의 눈빛은 조금 흔들릴 것입니다. 그가 이미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의 비인간적 행위간에 불일치가 우리로 하여금 갈등하게 만듭니다.

 

일을 못하는 사람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까요? 극악한 행위가 아니기에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예`하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이란 곳에는 집단의 속성상, 일을 못하는 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과가 나지 않고 일을 시켜도 깨적대고, 출퇴근도 분명하지 않은 그런 친구가 심심챦게 있는 곳이 조직입니다. 소위 왕따 혹은 문제아라 불리는 그들은 성과라는 면에서 조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 친구가 유난히 밥을 많이 먹는 장면을 보게 되면, 순간적으로 그가 `식충` 혹은 `한심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존중받을 인간으로 인식되지 않고 말입니다.

 

일을 못하는 게, 밥을 많이 먹는 게 극악한 범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순간 나에 의해서 인간 이하로 떨어지고 맙니다. 아찔하고도 슬픈 순간입니다. 조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를 속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나라는 존재 또한 그렇게 탁월한 직업인이 못되고 때로 분출하는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니 기실 그와 그리 먼 사이가 아닙니다. 내가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고 내가 그와 다른 존재라고 착각하고 만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직장에 다닐 때 저는 일을 잘하는 존재, 유능한 사람이 되길 얼마나 욕망했는지 모릅니다. 그건 집착이라 할 만했습니다. 지금도 그 열망을 가슴 한켠에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일을 잘해서만이 인정받는 존재라면 슬퍼질거다`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잘 하고 싶다, 잘하면 인정받을 거다` 쪽으로만 에너지가 흘렀지 `잘해서 인정받으면 슬플 거다`로는 감히 방향을 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일을 잘해서만이 인정받는 존재라면 나는 슬퍼질거다.`라는 글귀가 눈에 번쩍 띄였는지 모릅니다. 이 글에 생각이 머무는 사이 글귀의 슬픔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슬픔이라고. 유능과 인정을 열망하는 세상에 절실하게 필요한 건, 인간 존재의 슬픔이라고 말입니다.

 

존재의 슬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면 일을 못하는 그에게, 밥을 많이 먹는 그에게 그런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존재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눈을 떠보면 어떨까요. 곁에 있는 동료가, 일하는 직장의 모습이, 꿈꾸는 우리들의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일을 잘해서만이 인정받는 존재라면 슬퍼질거다. 슬픔이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