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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나다울 때

HIT 1510 / 차상민 / 2008-05-14


이 글의 주제(내가 가장 나다울 때)는 지난 주 `두/말/글` 시간에 제가 `즉석 1분 스피치`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이 글의 뒷부분만 말했습니다. 이 주제로 글쓰기를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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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나다울 때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이 못난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덩치만 크고 다른 오리들처럼 날렵하지도 못하고 커다란 궁둥이로 뒤뚱거리는 못난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오리들은 그들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오리새끼를 미워했습니다.

 

외톨이가 되어버린 미운 오리새끼는 어느 날 멋진 수탉을 봤습니다. 수탉의 커다랗고 멋진 꼬리털이 자신의 커다란 엉덩이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을 길게 뽑고 멋진 소리로 회치는 모습이 짧은 목에 꿕꿕 거리며 돌아다니는 다른 오리들보다는 긴 목을 가진 자기와 훨씬 더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리 위의 아름다운 벼슬이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그런 멋진 벼슬이 생길 걸로 믿었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오리들의 행동을 따라하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창피를 당하기보다는 멋진 수탉처럼 행동하면서 다른 오리들을 깔보며 뿌듯해했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이제야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조류독감이 창궐하면서 오리와 닭들이 살처분되었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다른 수탉과 함께 포대자루에 구겨진 채로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렇지만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이 수탉과 함께 죽는 것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정말로 수탉이었던 것이야!’

 

또 다른 미운 오리새끼가 있었습니다. 못생긴 오리새끼는 자라면서 몸까지 불어나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다른 오리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뒤뚱거리며 따라가지만 다른 오리들에게 항상 처지고 맙니다. 친구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낙오해버린 미운 오리는 어느 날 숲속의 한 호숫가에서 자기와 닮은 오리들을 만납니다. 미운 오리는 그들도 자기처럼 미움 받으며 낙오한 불량 오리들이라 생각하며 금방 친해졌습니다.

 

불량 오리들은 날개를 펴고 날기도 했습니다. 미운 오리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자기도 따라해 봤습니다. 하늘 높이까지 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짜릿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땅에서 사셨고 땅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엄마, 아빠 오리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일탈된 비행에 잠시 죄책감에 빠졌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불량 오리들과 높은 창공에서 폭주족 놀이를 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정신없이 하늘을 날던 미운 오리는 어느 날 사냥꾼이 쏜 엽총에 맞았습니다. 미운 오리는 엄마 아빠가 가르쳐 주신 대로 땅에서 오리답게 성실히 살았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후회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두 마리의 미운 오리에게 가장 ‘자기다운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미운 오리가 백조라고 알고 있기에 미운 오리에게 가장 ‘자기다운 모습’은 우아한 백조의 모습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닭이 되고 싶었던 백조는 죽는 순간까지 가장 자기다운 모습이 수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총에 맞아 죽은 백조는 우아한 백조의 飛行을 불량 청소년의 ‘일탈된 非行’으로 생각했지 결코 ‘자기다운 모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다운 모습’을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 자기다운 모습에는 자기가 동경하던 모습이 투영되었거나 주변 환경이 강요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굳게 믿었던 ‘나만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굳게 믿었던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그 허상들을 하나하나 깨트려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 평소에는 하찮게 여겼던 자신의 모습들이 자기 본질을 이루는 소중한 부분들이라는 것을 발견해 가는 것은 깨어진 허상의 허무함을 메울 수 있는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자기다운 모습의 허상을 허물고 숨겨진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은 혼자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수도자들이 평생 추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수도자들도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정진해도 불가능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깨어진 허상의 파편 속에서 숨겨진 보화를 찾아가는 고통의 과정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이자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기다운 모습을 찾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부부는 서로에게 서로의 진면목을 찾아주면서 결국은 서로가 같은 백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닭이라고 생각했던 백조와 엽총에 맞아 죽은 백조가 하늘나라에서 만났습니다.

 

엽총에 맞아 죽은 백조는 자기를 파멸의 길로 이끈 ‘비행 오리’와 닮은 오리를 하늘나라에서 다시 보자 겁이 덜컥 났지만 그 오리는 자신을 ‘닭’이라고 소개하여 안심을 했습니다. 스스로 수탉이라고 믿는 백조는 다른 백조를 보자 ‘암닭’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엽총 맞은 백조는 자기는 원래 착한 오리였는데 한 때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감히 하늘을 비행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수탉 오리’는 ‘비행 오리’에게 자신들은 원래 ‘닭’이었고 꿕꿕 거리며 다니는 오리가 아니었다고 ‘비행 오리’를 설득했습니다. 특히 자기는 ‘우아한 수탉’이라고 ‘비행 오리’ 앞에서 뻐겼습니다. 하지만 ‘비행 오리’는 ‘수탉 오리’에게 궁둥이가 수탉의 깃털과 다르게 생겼고 수탉처럼 벼슬도 없고 멋진 소리로 회 치치도 못하는 ‘오리’일 따름이라고 ‘수탉’의 허상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다른 오리나 닭들과는 달리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자신들에게 과분한 것도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오리인지 닭인지 백조인지 이제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사랑하는 상대방이 알려준 ‘자기다움’을 서로 나누며 한 평생 잘 살아갈 겁니다.

 

닭이 되고 싶었던 백조와 불량 오리라고 생각했던 백조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나는 법을 함께 배웠고 신혼여행을 시베리아로 함께 날아갈 겁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깨우쳐주며 백조의 호수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법도 배울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백조의 노래를 부르며 진정한 백조의 삶을 장식할 겁니다.

 

그들의 결혼식장에는 많은 하객들이 왔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들도 왔습니다. 그들은 방명록에는 황새라고 적었습니다. 뱁새들은 자기들도 백조들처럼 사랑하는 배우자로 만나 우아한 신혼여행을 떠날 것을 꿈꾸며 다른 황새들을 곁눈질 합니다.

 




금년 11월이면 제 처와 결혼한 지 20년이 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는 서로의 다른 모습을 보며 사랑에 빠졌습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수탉이나 오리나 뭐 그런 것으로 봤을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을 오리나 황새로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아내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또 아내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서로를 바라본 우리는 이제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나다울 때가 언제인지 묻는다면 저는 저의 아내와 함께 있을 때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뻗어 나의 사랑하는 황새의 어깨를 감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