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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즙 두 상자와 배 한 상자를 사며

HIT 673 / 정은실 / 2008-06-06

 


손님을 배웅하느라 바깥에 잠시 나갔습니다.

갑자기 누가 배를 깎아 담은 접시를 내밀며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바라보니 오늘 아파트 단지에서 트럭에 배를 싣고 와서 팔고 있는 분입니다.

일단 맛을 보게 되면 마음에 부담감이 생기는지라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아저씨가 그냥 한 번 먹어만 보라며 권합니다.

 

먹었더니 생각보다 배가 아삭아삭하고 달콤합니다.

`맛있네요` 하고 말했더니 농장에서 직접 농사 지어서 잘 저장했던 배랍니다.

생각날 때 연락 주시면 택배를 해드리겠다며 명함을 건넵니다.

투박한 손과 검게 탄 얼굴, 그리고 배를 만지는 손길에 담긴 애정을 보니

중간 상인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종이박스보다 더 큰 플라스틱 박스에 담은 배 한 상자 가격이 비싸보이지 않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직접 만든 배즙을 따라주십니다.

감미료 맛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달콤합니다.

배에 도라지만 넣어 달인 것과, 도라지, 은행, 생강을 넣어 달인 것이 있다며

기관지에 좋다고 열심히 설명을 하십니다.

가만히 아저씨 얼굴을 바라보니 참 눈이 맑습니다.

트럭 안에는 아주머니가 아직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대개는 쉬는 공휴일에,

좀 더 나은 가격으로 팔기 위해 직거래를 해보려고

먼 평택 농장에서 이곳까지 젖먹이를 데리고 먼 길을 나선 아저씨를 보니

참 열심히 사시는 분이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은 벌써 해가 기울려고 하는 오후인데,

아직 트럭에 가득 쌓여있는 배 상자들을 보니 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배 품질은 괜찮지만 바로 옆에 농수산물 시장이 있고 큰 마트들이 있으니

배 한 상자 팔기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지만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상품을 소개하는

아저씨 모습이 참 건강해보였습니다.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그만큼의 대가를 얻어야 하는데,

문득 몇 시간 강의를 하고 받는 나의 소득이 과분하다 싶었습니다.

이분이 가꾼 배는 이렇게 사람들의 몸에 건강과 즐거움을 주는데

내가 한 강의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배즙 두 상자와 배 한 상자를 사면서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어떤 땀을 흘렸나.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나.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내가 가진 것을 자부심과 열성을 가지고 권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