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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단상 1 (가을비 지나간 어느 오전에)

HIT 486 / 정은실 / 2008-09-26



밤새 가을비가 내려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던 어제,

오랜만에 회의도, 강의도, 수업도, 가족들도, 외출도 없어서 더욱 고요했던 어제 오전,

혼자 산책을 했습니다.

열기가 가신 가을 공기,

아직은 무성한 초록 사이로 붉고 노란 가을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는 나무와 풀들.

시작된 가을을 음미하며 천천히 길을 걷다가

두 그루의 관상용 사과나무가 3-4미터쯤 떨어져서 나란히 서 있는 곳에서 발걸음이 멎었습니다.

 

두 나무 모두 비슷한 키에 비슷한 굵기의 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나무는 잎이 무성한데 열매가 적고

다른 나무는 잎은 거의 없고 열매가 다른 나무의 열 배 이상 달려 있었습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옆의 나무들과 경쟁이 적은 공간이라 아직 성장하고 있는 단계 같았고,

잎이 거의 없는 나무는 옆의 나무들에 밀려서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싱그러운 옆의 나무에 비해서 잎도 없이 무겁게 열매만 안고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더 많은 씨를 뿌리고 가려는 자연의 본능을 보았습니다.

 

저 많은 씨앗들 중에서 하나라도 싹이 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도시의 산책길에 심어진 운명은 많은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울 공간이 많지 않은데

나무에게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지혜는 허락되지 않았나봅니다.

혹은 그 사실은 이미 알지만,

새들이 날아와서 열매를 먹고 그 씨앗을 어느 야산에 떨어뜨려줄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나봅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나 봅니다.

 

젊은 사과나무와 삶의 마지막을 앞에 두고 있는 사과나무, 그 두 나무를 보며

태어나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모든 생명에게 평등한 이 시간의 흐름 중에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씨앗을 남겨서 싹 틔우고 싶은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수많은 씨앗들 가운데 어느 씨앗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것이며,

그 씨앗이 싹틀 수 있는 최적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을...... 이 고마운 시간이 또 나를 사색에 빠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