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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단상 2 (눈부신 어느 오전에)

HIT 468 / 정은실 / 2008-09-26


 


오늘 아침,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마지못해 일어난 아이들이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엄마, 갑자기 이렇게 가을이 올 수도 있는 건가요?”

아이들에게 가을은 차가움이었나봅니다.

입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긴 셔츠들을 입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습니다.

오늘도 밤에 학교 강의만 있는 날이라 그냥 게으름을 부릴까 하다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먼지들이나 치우자 하고 시작된 청소가

아이들 방 침대 아래 먼지까지 치우게 되었습니다.

 

침대 구석에는 다른 곳에 둘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3년 전에 이사를 할 때 놓아둔

여러 권의 앨범들과 뭘 넣어두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 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궁금해 하면서 상자를 열어보니 10년도 훨씬 전의 사진들, 엽서, 편지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남편의 어학자료 대출증 사진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스물 살 젊은 남편의 사진을 보다가 웃음이 나왔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큰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 앨범 앞에 박힌 사진과 너무 닮았습니다.

 

그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진들이라 생각하며 대충 상자에 넣어놓았던

여러 사진들 속에는 남편과 나의 옛 동료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의 우리처럼 대부분 미혼이거나 신혼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잠시 모여 찍었음에 분명한 차림새들로 여러 장이 있었습니다.

모두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들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첫 번째인가 두 번째 해외출장 중에 그늘 하나 없이 밝고 당찬 모습으로 찍은

나와 남편 각자의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아, 그때 그 공간에 그들과 내가 있었구나. 문득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습니다.

 

끝도 없이 추억 속을 돌아다닐 것 같아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청소를 마치고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2008년 9월26일 금요일 오전 10시,

창밖에는 어제 언제 흐린 적이 있었냐는 듯이 햇살이 가득합니다.  

붉은 열매를 가득 안은 대추나무 작은 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햇빛 아래 물결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어제는 고요해서 좋더니 오늘은 온 세상이 반짝여서 좋습니다.

여름은 뜨거움 속에서도 그리 싱그러워 좋더니 가을은 뜨거움과 차가움이 함께 있어 좋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때는 힘들었지만 일할 기회가 많아서 감사하더니,  

이렇게 차 한 잔 두고 여러 권의 책을 펼칠 수 있는 혼자의 시간이 많아진 요즈음은

그간 바쁨을 핑계로 걸어보지 않아 수풀 자란 내 마음속 산책길들을 이리저리 걸어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 요즈음이 이렇게 고운 가을이라 더 감사합니다.

아마도 이 계절이 지나면 내 안에도 저렇게 고운 열매 하나가 또 영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