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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설 이야기

HIT 520 / 정은실 / 2009-01-28


 

설 연휴 하루 전날, 우리 가족은 느긋하게 오후 4시에 천안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천안까지는 아무리 막혀도 4~5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던 귀향길이 그 다음날 새벽 5시30분에 끝났습니다.

그렇게 오래 차 안에 있었던 적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오래 눈길을 운전을 했던 적도 처음이었습니다.

 

출발지 평촌에서 경부고속도로 기흥 휴게소에 도착을 한 시간이 무려 밤 9시였습니다.

요기라도 할까 했다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여서 휴게소를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포기하고 기흥 IC를 통해서 국도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즈음 가늘게 뿌리던 눈이 아주 탐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에 함박눈으로 시야까지 확보되지 않아서 기흥 IC를 빠져나와서 잠시 헤매던 우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일단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창이 넓고 실내에 피워진 모닥불이 예쁜 식당에 앉아서

눈 구경을 하며 여유로운 식사를 했습니다.

대충 때우려고 했다가 제대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모닥불 구경을 하게 된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우리도 이제 기흥까지 왔으니 늦어도 2시간이면 천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눈 구경을 하며 한참을 쉬었습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가 ‘부산까지는 도저히 못 갈 것 같아서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그냥 남의 이야기처럼 들었습니다.

잠시 전에 ‘안성까지 정체다.’라는 안내방송도 들었던 터라 정말 걱정이 없었습니다.

 

밤 11시, 따뜻한 식사,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대감,

그리고 7cm 이상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황홀한 광경을 즐기며 국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고속도로와는 다른 아기자기한 밤풍경들이 보이는 국도는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자정 무렵부터 다시 길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제설작업이 되지 않은 도로에 갑작스럽게 깊게 눈이 쌓이자

스노우 타이어를 장착하지 않은 차들이

얕은 오르막길도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차도 스노우 타이어는 없었지만 다행히 바퀴를 교체한지가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인지

눈길에 퍼져버린 차들을 뒤로 하고 무사히 3개의 오르막길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국도로 계속 갈 수 없겠다 싶어서

다시 송탄 지점에서 ‘오르막길이 없는’ 고속도로로 빠져 나왔습니다.

자정이 한참 지났으니 이제는 고속도로가 좀 뚫렸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는 여전히 정체상태였습니다.

순간 많이 막막했는데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귀향길처럼 인생이 계속 이렇게 힘들면 참 살고 싶지 않겠다...

꽉 막혀서 길을 바꾸었는데 바꾼 길은 더 막히고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어야 하고

다시 길을 바꾸었는데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정말 힘들겠다...

그것도 남들은 잘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차가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옆 차가 와서 들이받기까지 한다면...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아도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지기만 한다면 정말 힘들겠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했지만,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기름이 충분하고, 오르막길도 잘 넘어섰고, 사고도 나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고,

아이들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고,

아이들 아빠는 짜증내지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운전을 해주고 있고,

도착지가 부산이 아니라 천안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도착시간에 몇 시가 될 것인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며 걱정을 놓아버리자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망향 휴게소를 지나서야 제대로 달리기 시작한 차가 천안 아버님 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차가 집 앞에 서자마자 밤새 뜬눈으로 기다리셨던 아버님과 고모님이 뛰어나오셨습니다.

우리가 도착할 것을 기다리시면서 그 새벽에 몇 번이나 집 앞의 눈들을 쓸어내셨답니다.

즐거움, 불안, 기대감, 막막함, 놓아버림, 죄송함, 고마움...

그렇게 긴 귀향길로 시작된 설 연휴.

눈 때문에 귀향길은 길었고 수면부족으로 몸은 내내 힘들었지만,

설 연휴 내내 눈에 뒹굴며 강아지처럼 노는 아이들을 보며 좋았습니다.

막내는 눈덩이에 맞아서 안 그래도 통통한 뺨이 더 부풀어 올랐는데도

아픈 줄도 모를 정도로 잘 놀았습니다.

추운 데서 옷 버려가며 노는 것을 싫어하는 큰 아이도 거의 집 밖에서 살았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다시 풀린 기온에 이제 눈이 또 언제 내렸느냐는 듯이 스러지고 있네요.

이제 음력 새해도 끝났으니 핑계 댈 것 없이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녹아가는 눈들에 남은 연휴의 흔적들 함께 녹여버리고

이제는 봄맞이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소담스럽게 내린 눈으로 흠뻑 뿌리를 적신 나무들도

아마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줄기 속에서 가지 속에서 기운차게 봄맞이를 하고 있겠지요.

남은 겨울, 곧 시작될 봄, 그리고 변함없이 찾아올 여름, 가을... 올 한 해도 기대됩니다.

내 나무에는 또 어떤 싹들이, 꽃들이 피어날지,

우리의 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만들어질지......

 

모두에게 올 한 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