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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2009년 2월20일 금요일

HIT 515 / 정은실 / 2009-02-21



# 1.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어제 내린 싸락눈이 차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얼마 내리지 않은 눈이었는데 뚝 떨어진 기온에 2월의 나무들이 하얀 눈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나목들만 안은 산의 속살이 하얀 눈빛으로 고왔다.

차가운 공기에 흰 눈빛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늘 2시간은 어떤 이야기를 지난주와는 다르게 해볼까 생각하며

1시간쯤 차를 달려서 서울시 인재개발원에 도착했다.

 

아침 9시에 마흔 명의 시선을 받으며 앞에 섰다.

다소 지친 것 같아 보이는 표정들 사이에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표정들이 보인다.

아, 오늘은 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왔나보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며

가슴 속에 살짝 즐거운 긴장이 번진다.

약 2시간 동안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깊게 빠져드는 몇 명의 시선을 느낀다.

반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사람들의 무료한 시선들도 보인다.

낮 11시. 강의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환한 웃음을 가득 담고 한 교육생이 계단을 달려 내려오며 인사를 한다.

사무실이 어딘가를 묻는 그에게 홈페이지를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 이야기에 공명해준 그가 고맙다.

내 에너지가 좀 더 커진다면, 내가 좀 더 이 주제에 대해서 깊어진다면

나는 이 모든 사람들과 2시간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더 잘 공명할 수 있을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 2.

 

낮 1시 30분. 봄방학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과 집에서 점심을 먹고 교산과 천안으로 출발했다.

강의 시간을 앞당겨달라는 고객의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고,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바로 출발을 했다.

별로 막히지 않는 한낮의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려서

K사의 직원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천안 상록 리조트에 도착했다.

K사의 사장께서 직접 기다리고 계셔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의 책 ‘상사가 감동하는 보고서’를 인상 깊게 읽으셨단다.

당신의 생각과 많이 일치해서 직원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싶으셨단다.

3시간 동안의 강의. 실습과 피드백을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그들의 어려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직접 보았다.

현장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은 언제나 소중하다.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어려움들을 좀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은 뭘까,

교육시간이 짧더라도 최대의 학습효과를 얻게 도울 방법은 뭘까,

아쉬움을 안고 6시 50분에 그곳을 떠났다.

 

# 3.

 

저녁 7시 10분. 병천에 있는 순대집을 찾아서 교산과 저녁을 먹었다.

‘순대는 병천순대가 맛있어.’ 이것이 우리 신념 중의 하나였는데,

우리 입맛이 변한 것일까, 이 집 음식이 변한 것일까. 맛이 없다.

하긴 기억 속의 맛이 실제 맛보다 맛있다.

시간은 과거를 실제와 다르게 채색한다.

그건 아마도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 어떤 그리움은 그저 그리움일 때 더 아름다운가보다.

 

# 4.

 

8시. 천안에 계신 아버님을 뵙고 가려고 아버님 댁에 들렸다.

예기치 않은 우리들의 방문에 무척 반가워하신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정정하신 아버님.

우리들의 방문이 반가우셨는지 평소 별 말씀이 없으신 아버님이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요즘 편찮으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버님이 그 연세에도 건강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자주 느껴진다.

비록 기력이 이제 예전 같지 않으시지만,

아버님이 지금의 건강을 잘 유지하시면서 삶의 황혼기를 잘 바라보시기를 기원했다.

 

# 5.

 

아버님 댁에 머무는 사이에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과 장례에 대한 방송을 보았다.

매서운 날씨에도 2km가 넘는 조문 인파가 이어졌다는 소식,

평소 청빈하게 살았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서 장례 또한 검소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며,

힘든 임종의 순간에도 스스로 호흡을 유지하며 ‘고맙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한 사람의 위대한 삶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느꼈다.

추기경이기 전에 한 신앙인이었고 신앙인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을

한 사람이 살아온 87년의 삶에 경건함을 느끼며 존경과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그 분이 마지막으로 남기셨다는 말씀......

진리는, 소중한 것은, 그렇게 쉬운 말로 표현될 수 있으나, 그 실천은 참 어려운 것인데

그 어려운 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보여주고,

떠나는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빛이 되며 떠난 아름답고 귀한 삶을 사신 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의 이기적이고 게으른 삶을 돌아보며 내 삶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았다.

 

# 6.

 

집으로 돌아오니 밤 11시 10분.

돌아올 따뜻한 가정이 있다는 것, 반기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두 아이들의 숙제 검사를 하고 잠자리를 돌봐주었다.

교산은 밤늦은 시간에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에게 책읽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7.

 

오늘 뭐가 좋았지?, 남편과 하루를 마감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하며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오늘.

뜻한 대로 되기도 하고 뜻한 대로 되지 않기도 한 오늘.

그 하루의 갈피를 들추어보니 충만함 속에도 미진함 속에도 작지만 소중한 나의 역사가 있다.

 

의도, 기대, 만남, 나눔, 애씀, 실망, 반성, 성장, 부끄러움, 감동, 바라봄, 성찰, 배움, 사랑, 감사,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