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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기신 선물

HIT 525 / 정은실 / 2009-05-06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제 3주일이 넘었습니다.

무시로 찾아드는 온갖 기억들에 툭하면 눈물이 흐르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곳이 텅 빈 듯 먹먹한 느낌은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온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하는 강의시간 외에는

늘 마음 한 곳에 예전에는 없던 그 느낌이 있습니다.

가끔씩 거울로 들여다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많이 사라진 것이 보입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끼면서 하려고 했던 일들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4월을 보내면서 나는 그 일들에 마음을 보내는 것도 잊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날 일에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불안해할 일에도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미안해할 일에도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기뻐할 일에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안에 이미 있었지만 한 번도 샅샅이 살펴보지 않았던

어떤 영역의 문이 열리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그곳을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로 인하여 일상의 흐름들이 대부분 그 궤도를 벗어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삶의 의미, 가치, 존재함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죽음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생각해왔고 나의 관점을 정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며칠간의 그 힘든 시간과 마지막 순간 임종을 하며 나는 알았습니다.

그간 내가 ‘생각’으로만 알아왔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한 호흡을 경계로 삶과 죽음이 있음을 내 몸으로 느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평소 그렇게 자제력이 강하시던 아버지에게도

죽음은 얼마나 두렵게 다가오는지를

그 두려움에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것을 돕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죽음은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삶의 한 과정임을 알았습니다.

 

마지막 한 호흡이 떠나버린 육신은

한 점의 에너지도 남지 않은, 한 정지된 물체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일순간에 생명의 모든 징후들이 사라진 육신에는

핏기도 온기도 그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가 그 긴 고통으로부터 편안해지셨구나, 안도를 하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이로 몰려오던 그 슬픔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두면서

수개월 동안 고통 때문에 제대로 똑바로 눕지도 못하셨던

아버지의 육신을 곧게 펴드리며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았잖아, 하며 미루다가 못해드렸던 것들의 용서를 구하고

긴 세월 아버지와 자식의 인연 속에서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모든 것들에 감사를 드리며,

아버지의 영혼이 그 어떤 걸림도 없이 다른 세계로 가시기를 빌었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3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난 느린 듯 깊은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소용돌이의 마지막은 어디일까,

이것이 일시적인 것일까, 아니면 오래 지속될 것일까,

이 과정을 통하여 나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무엇을 잃을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는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아직 나는 그 소용돌이의 끝을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형성해온 많은 것들의 중요도가 재점검되고 있는 이 먹먹함 속에서도

여전히 분명한 몇 가지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

죽음은 가장 큰 배움의 순간이며 그것이 그 어떤 형태이든 삶의 아름다운 마침표라는 것...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지나갈 뿐이지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일어나는 의미가 있다는 것...

내 삶 또한 다른 수많은 삶과 다르지 않으나

다른 수많은 삶들이 소중하고 가치 있듯 나의 삶 또한 그러하다는 것...

 

이제 머지않아 내 일상은 다시 예전같은 흐름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 유사해 보이는 흐름 속에서

예전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자유롭고, 더 많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어린 자식 둘을 사별한 후에 얻은 딸이라 어렸을 때 나에게 유난히 사랑을 쏟으셨다는 아버지,

아버지가 나에게 주고 가신 선물이 참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