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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HIT 526 / 정은실 / 2009-07-10



며칠 전에는 강원도 평창에서 있었던 내 강의에 남편이 운전을 핑계 삼아 따라와서

내가 강의를 하는 동안 숲 구경 물 구경을 하며 하루의 휴가를 가졌는데,

오늘은 전라도 광주에서 1박2일간 진행되는 남편의 강의에 내가 그렇게 따라왔습니다.

원래는 강의 모니터링을 해주거나 일부 강의 지원을 해주고 싶었는데,

남편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새벽에 출발해서 3시간 반 정도 걸린 운전 길은,

밤잠을 설쳤음에도 졸음 한 번 없이 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지치지 않은 7월의 초록과 구름을 살짝 두른 산의 능선들 때문이었습니다.

강의가 진행되는 연수원에 남편을 내려주고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그냥 안내판을 보며 가고 싶은 대로 방향을 잡아서

낯선 전라도 땅을 30여분 정도 운전을 한 것도 좋았습니다(길치인 나는 이런 일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

 

그렇게 찾아간 담양의 소쇄원에서 작은 폭포와 그림 같은 옛집, 그리고 대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특히 인상 깊게 본 것은 대숲에 삐죽삐죽 솟아 있는 죽순들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진이 아닌 실물로 죽순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라, 여기 저기 다양한 높이로 솟아 있는 죽순들이었습니다.

식재료로 잘 손질된 죽순이나 잘 찍은 사진 속의 죽순만 보다가,

땅에 솟아나있는(죽순은 ‘돋아난’이라는 표현보다 ‘솟아난’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네요)

죽순을 보니 신기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초록색으로 여물기 전에는 대나무는 잎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내 키보다 두 배쯤 커 보일 정도로 많이 자란 죽순에도 잎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대나무는 얼마나 자라야 잎을 피우는 것일까, 왜 그럴까 궁금했습니다.

다른 숲도 그렇지만, 빛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대숲에서 햇빛을 얻기 위해

대나무는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단 빠르게 키부터 키우는 것일까,

그런 추측을 해봤습니다.

 

소쇄원을 나와서 차와 식사를 함께 하는 곳에 들어왔습니다.

‘두 분이신가요?’라고 묻는 주인에게 혼자라고 답을 하니 의아하게 쳐다봤습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책을 읽었습니다.

법상 스님의 책이었습니다.

‘바라지’말고,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누리라.’

‘바란다는 것’은 현재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바라기만 하면 계속 결핍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대신 현재 가진 것의 풍요로움을 계속 느끼고 누리게 되면,

그 풍요로움을 계속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법문이 참 와 닿았습니다.

무엇을 바라더라도 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 없이 바라기,

즉, 서원을 하게 되면 그 서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그러한 서원이 마음의 그릇을 키우게 된다는 말씀도 참 와 닿았습니다.

 

잠시 후에는 또 이 장소를 떠나서 어디론가 갈 것입니다.

오늘은, 참 선물 같은 시간입니다.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1박2일 엄마의 부재를 이해해준 큰 아이에게,

하필이면 가까운 곳을 두고 이 먼 곳에 강의가 생겼고 내 강의지원을 거절해준 남편에게,

1박2일의 휴가를 선택한 나에게 감사합니다.

 

잠시 전에 비가 내리더니 해가 났습니다.

아직 구름이 다 걷히지 않아서 적당히 밝은 햇살.

내 마음이 지금 이 햇살 같습니다.

아직 다 걷어내지 못한 구름들이 내 마음에도 있음을 알지만,

오늘은, 이 구름들조차도 있는 그대로 편안히 지켜봐지는 그런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