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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에 새로 받은 편지

HIT 571 / 정은실 / 2009-08-14



우리 친구 은실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함

 


                                          - 1987년 늦은 봄 생일에 친구에게 받은 詩 -

 

 

척박한 강토라도 우리네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내 친구 스물을 키워온 슬픔도, 분노도, 작은 기쁨도 이렇게 아름다운 날을 맞듯이

이 땅의 많은 혼들도 꽃길 걸어갈 아침을 웃게 될 겁니다.

 

우리가 네 해째 친구의 여린 그림자 빚으며

그에게서 기쁜 웃음도 슬픈 눈물도 구한 것은

친구의 그림자 어여쁘길 바랐던 것이요,

그가 우리와 함께 아름답게 커왔던 탓입니다.

 

이제 스물이 되어 아픔을 견디는 마음 깊어지고

기쁨 주는 그 마음 투명하여

어른이 되어도 좋을 우리의 친구

 

스물의 장미와 우리의 입맞춤이

친구의 남은 더 많은 생을 위안할 노래가 되고,

함께 즐거워할 미소가 되고 어둠 밝힐 등불이 되어

우리 사이 사랑을 지켜줄 것입니다.

 

친구여

함께 스물인 우리의 친구여

그대 간혹 새되어 하늘로 날더라도

가벼운 미풍으로 벌판을 산책하더라도

지친 몸이 쉬어갈, 그대 마음속 키워둔 등대 같은

우리가 있음을 잊지는 말라.

자유와 구속, 방황과 안주가 늘 그대와 함께 하리니

세 번 불러 우리를 찾게,

그대 영혼 혼자는 그때 너무 외로울 때.

 

장미일 땐 장미이고 수선일 땐 수선이고 백합일 땐 더욱 백합이어서

서너 번 고독과 서너 번 환희에도 침식되지 않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 넉넉한 영혼이 더욱 푸르러져라.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사랑으로 항상 그대와 함께 하리라.

 

- 늦으나마 너의 성년을 함께 생각하고 기도한다. 87년 5월 말일 牛石

 




서랍을 정리하다가, 아주 여러 해 동안 손을 대지 않았던 편지함을 봤습니다.

한 편지봉투에 이름 대신 `牛石`이라 적힌 호를 보며 누구인지 궁금해서 편지를 꺼내어 읽었습니다.

다 읽고도 누구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같은 필체로 된 다른 편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제야 누군지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기억이란 정말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

아!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그 친구를 잊어버리다니...

22년 전, 나에게 이런 글을 줄 수 있었던 친구들을 왜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는지...

슬픔을 견디는 마음은 아직도 더 깊어져야 하고 기쁨을 주는 마음은 아직도 더 투명해져야 하는 나는

과연 지난 22년 동안 얼마나 성장한 것인지...

내 영혼은 얼마나 더 푸르러졌는지...

 

편지를 보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영어서클 활동을 같이 했던 남자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글도 잘 썼던 그 친구와

서클 활동 외에도 몇 번인가를 따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독신으로 살기로 했지만 만약 자기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아마 나일 거라고 말해서 내 맘을 설레게 했던 그 친구는

대학에 가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편지의 날짜와 내용을 보니,

이 편지는 그 친구와 내가 서로 ‘친구’로 지내기로 했던 그 이후의 글입니다.

살아가는 소식을 어쩌다 한 번씩 다른 친구를 통해서 건네 들었던 그 친구는

자기가 아주 오래 전 한 친구의 생일에 이런 글을 보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내가 그의 글을 받은 것을 잊어버렸듯이 그 또한 그가 보낸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아주 오래 전 그때 스무 살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공부했던 그 시절의 방황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과

친구에 대한 우정이 있었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미안함과 안타까움 외에도 이런 느낌, 이런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글을 남겨두자.

고마운 것들, 감사한 것들, 기쁜 것들, 축하하고 싶은 것들, 아픈 것들, 고민하는 것들 모두.

그리고 때때로 글을 보내자.

비록 마음이란 것이 일시적인 것이고 흘러가버릴 것이라 하지만,

바로 그 시점의 그 마음은 진실한 것이니,

감사함이 사라지기 전에 감사하다고 전하자, 사랑이 사라지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자.

자주는 말고, 어쩌다 한 번씩 오래 전의 글들을 들여다보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내 성장의 눈금을 들여다보고 자축해주자.

나를 성장시킨 사람들과 사건들과 시간들에 감사하자.

 

... 지금은 나와 같은 나이로 성장해있을 그때의 그 친구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를 보냅니다.

 



반갑다, 친구야.

22년 만에 네 편지를 새로 받은 느낌이다.

스무 살이었던 나는 지금 여기 이런 모습으로 성장해있는데,

스물 살이었던 너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니?

네 편지를 받고 나는 어떤 답신을 보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내 답신이 나도 궁금하구나.

 

고맙다, 친구야.

내가 성장해온 것은 정말 나의 힘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귀한 우정과 기원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이제는 나처럼 40대의 삶의 고민들을 안고 있을 너,

분명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해가고 있을 너,

네가 소망하는 일들을 아름답게 이루어가길,

네가 이 땅에서 경험하고자 하는 일들을 힘 있게 경험해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아주 늦으나마 너의 기원에 감사하며, 2009년 8월 중순 麗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