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개발연구소 로고

밤, 감, 호수, 놀

HIT 624 / 정은실 / 2009-09-03



베란다를 청소하다가, 학창시절 학교 시화전을 했던 액자들을 봤습니다.

시화전 후에는 어릴 적 내 방에 걸려있었는데,

부모님이 이 액자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을 해두셨나봅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집안 정리를 하다가

잘 묶어서 장롱 위에 올려두신 것들을 보았습니다.

나는 바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나중에 넓은 집 사거든 잘 걸어놓으라고 하셔서

그냥 우리 집으로 다시 싣고 왔던 것들입니다.

 

지금 내가 읽기에는 시도 그림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부모님은 어린 딸의 시화전 출품작들이 자랑스러우셨나봅니다.

 

그 마음때문에 차마 그냥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시들만 남겨놓습니다.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했던 그 시절의 내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사물을 그대로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생각 속에 빠져드는 내 모습이 그대로 있군요.

 

나는 그동안 어떤 성장을 했던 것일까,

어설픈 어린 시절의 시 속에서도 발견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서

시 네 편 옮겨 놓습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시)

 

터질 듯 터질 듯한

진홍빛 울음이더라

진한 미련을 담은

슬프도록 고운 이별이더라

핏물처럼 번져와

마지막 남은 빛을 호흡하다가

꽃잎처럼 스러져야 했던 말없는

안타까움이더라

......

 

밤으로 접어드는 텅빈 어둠 속에

놀빛 눈물만

내 가슴에 남았더라

 

 

 

호수 (중학교 2학년 때 화랑 문화재에서 입상했던 시)

 

흐르다가

멈췄다가

고여버린

커다란 가을

 

창공이 물되어

고요히 맴돌고

구름은 한 마리 백어되어

둥둥 흐르고

 

얄얄한 갈바람도

아쉬운 듯 살짝

휘젓고 달아나고

 

아리한 여운 뒤로

물잠자리 한마리 배앵뱅

원을 그린다.

 

가을의 모든 것이

흐르다가

살피다가

멈춰앉은

호수는

가을의 나루터 주막집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했던 시)

 

기인 긴 여름동안

장대 든 꼬마들의 따가운 눈총을 용케도 이기고서

이제 겨우 엄마 품을 벗어난 여린 돌장이야!

 

검은 듯 누른 듯

매끄러운 조그만 너의 모습에서

난 지나간 겨울의

따스했던 추억 속을 헤맨다.

 

달아가는 화로 속에서

작은 네가 익어갈 때면

할머니의 이야기도 익어가고

우린 해와 달이 된 오뉘가 되고

눈보라도 찬바람도

귀 기울이다 잠들어 버렸다.

 

이젠 할머닌 영영 떠나시고

할머니 이야기도 사라지고

그래도 너는 또 이렇게 여물었구나

 

 

 

(중학교 2학년 때 청마 추모 백일장에서 입상했던 시)

 

속삭이던 잎새들도

어디론가 떠나버린 지금

댕그러니 가지를 업고

가을을 만난다

파아란 하늘 꼭대기에서

빠알간 꿈을 익힌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하늘과 맞닿은 곳

스산한 바람 홀로 찾아

향취만 앗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