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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의 어려움

HIT 618 / 최학수 / 2010-01-06




어제 책들을 정리했다. 새해라는 시기도 있거니와 책장 하나가 새로 들어온 때문이다. 공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여기저기 쌓아두고 겹겹이 책장 속에 넣어 둔 책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기로 했다. 두세 시간이면 될 줄 알고 시작했는데 결국 종일 동안 씨름하고 말았다. 일을 마칠 즈음엔 다리가 아팠고,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 꼼짝하기 힘들 정도였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으나, 정리 작업이 내겐 중노동이었다. 심신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었다.


책을 정리하는 일은 사실 단순했다. 버릴지 말지, 그리고 버리지 않는 책을 어디에 둘지 그 둘을 결정하면 되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책들이 손에 잡히는 순간 그 운명 혹은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러지 않은 예외의 책이 문제였다. 시간과 에너지의 대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책, 즉 버릴지 말지의 경계, 분류의 경계에 있는 책들에 쓰여졌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책을 버리는 일은 나에게 꽤나 힘든 일이다. 버리려 할 때면 유독, 경험하기 힘든 희귀한 상황을 떠올리는 건 왜일까. ‘이거 긴히 필요할 때 없으면 어떻게 하지?’지난 몇 년간 손길 한번 주지 않았는데, 앞으로 볼 일이 있을 걸 가정하고 미리 걱정부터 하다니... 그런데 그 불합리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먹히는 게 현실이다. 미래를 염려하고 대비하는 유전자가 발동되는 탓인가.


여하간 어렵게 버리기로 정한 책들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살펴보니 20년도 더 된 옛 책들이 많았다. 대학 교재들이었다. 실러버스나 기말고사 문제지가 끼워져 있는 것도 있었고, 손때 묻은 어떤 책엔 갈피갈피 밑줄이나 메모가 있었다. 내용이 아니라 추억 때문에 버리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그런 책은 감성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도 뭔가 당기는 게 있었던 게다.


대학 교재 외에 버려진 책들을 살펴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보였다. 읽을 만한 대목이 있어 쌓아 둔 잡지, 소소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 시대의 흐름이나 최신 자료를 담은 정보 중심의 단행본 등이 많았다. 뒤집어 보면 시류나 유행을 덜 타는 주제와 내용, 유려함보다는 정확함을 추구하는 글을 내가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 확연했다.


반면 몇 번 망설이다 끝내 버리지 못한 책이 하나 있었다. 톰 피터스의 ‘해방 경영’이라는 책이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책장 맨 아래 구석에 있던 그 책은 그 간 내 시선을 끈 적이 없을 뿐더러, 저자가 세계적인 경영 구루로 칭송 받았으나 한 때의 영예였을 뿐 그 빛이 바랜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깊이 있는 통찰 보다는 수많은 기업 사례를 천 페이지 넘게 나열했기에 미련 없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해방(Liberation)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왔다. 조직의 사람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시키는 경영,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기업 경영에서 해방이라는 개념은 매우 생소한데 90년대에 내걸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몇 쪽을 펼쳐보니 당시 저자의 생동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해방된 느낌, 적어도 저자의 글은 거침없고 자유로운 기운이었다. 버리지 않고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책을 옮겨 놓았다.


버리는 것 못지 않게 노력이 드는 게 제대로 분류하여 제자리에 놓은 일이었다. 경영서적의 경우, 리더십/커뮤니케이션/대인관계/변화 혁신/창의성/전략/조직/인사/교육/NLP/에니어그램/피터드러커 등으로 구분했는데, 분류에 들어맞지 않거나 두루 걸쳐있는 책이 말썽이었다. 이를테면‘리더십 커뮤니케이션’, 이걸 리더십에 넣어야 하나, 커뮤니케이션에 넣어야 하나. 결국 내 마음대로 분류했지만 그래 놓고도 찜찜함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을 많이 모으기 보다는 내 인지적 틀을 세우고 그것에 맞춰 체계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서 제대로 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내 기질적 특성이 책 정리 장면에서도 드러났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분류하고 필요할 때 정확하게 갖다 쓸 수 있기를 원하듯이 책 또한 그렇게 정리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니 힘이 들 수밖에…


하루의 수고로움을 들여 책 정리를 마치고, 버릴 책과 자료들을 거실 한 켠에 쌓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눈앞의 성과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묵은 숙제를 한 시원함이 있었고, 책과 함께 내 머릿속 생각도 정리된 느낌이었다. 좀 비웠으니 이제 다시 들일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있었다. 누렇게 바랜 대학 교재들, 쓸 날을 기대하며 모았던 스크랩 자료들, 포스트 잇이 삐죽 나와 있는 이런 저런 책들을 떠나보내며 질문 하나가 올라왔다. ‘그토록 연연했던 책을 버릴 수 있게 된 나는, 책이 담고 있는 노후화된 지식을 넘어선 것일까 혹은 책에 대한 집착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