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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

HIT 558 / 정은실 / 2010-03-17



노트북을 정리하다가, 1월 말에 썼던 글 한 편을 봤습니다.

그냥 썼다가 아무 곳에도 올리지 않고 그냥 뒀던가 봅니다.

다시 읽으니 새롭습니다.

벌써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지난 1월의 내 일상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문득, 요즘 내가 좀 바쁘게 살고 있었구나, 알아차립니다.

아침에 차 한 잔의 여유를 잘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새삼 알아차립니다.


오늘도 눈이 내리네요. 봄이 참 더디게 옵니다.

하지만, 3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가는 날력을 보며, 피어오르는 새싹들을 보며, 계획한 일들을 보며,

이미 마음은 분주한 봄입니다.

봄을 느끼며 일어나는 신선함과 설렘.. 그 속에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바쁨`...


그 마음의 바쁨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바쁨 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면,

봄의 신선함과 설렘을 고요하게 껴안고 일상에 몰입할 수 있다면, ... 하는 생각이 피어납니다.


마음에 바쁨이 느껴질 때,

그럴 시간이 없는데 싶을 수록 의도적으로 멈추고,

차 한 잔과, 그 차 향과 어울리는 사람과, 자주 마주 앉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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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어두움을 막 헹구어낸 빈 손바닥에

하루를 올려놓고 기울인다

헌신의 작은 몸부림 한 모금 들어와 하루를 열고

두 모금 들어와 눈을 열고

다 비우고 나면 하늘이 열리는 이 기막힌 떨리움

그 안에 그만 내가 잠긴다

아침에 마시는 차는 빛 한웅큼

내 속에 메마른 골짜기 구석구석 스며들어

가로막힌 산을 뚫고 황량한 들판 먼 마을까지 적신다.


김영교 시인의 ‘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요즘 나의 하루는 모닝페이지로 시작됩니다.

잠을 깨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쓰다가 마음에 다가오는 어떤 생각을 만나면, 20여분 동안 명상을 합니다.

특별히 만난 생각이 없는 날은,

글을 마친 후에 20여분 정도 나의 가장 깊은 마음자리로 들어가는 명상을 합니다.


아침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에는,

파트너 교산과 같이 차 한 잔을 마십니다.

주로 그날의 일정을 나눕니다.

서로의 아이디어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강의가 있는 날은, 9시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차 한 잔을 마십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공간 전체를 둘러보고,

비어있는 자리 하나하나에 마음을 보내며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 지,

내가 오늘 무엇을 할지를 마음으로 그려봅니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만나며 마음에 세운 다짐들이 그날의 등대가 됩니다.


바쁠수록 멈추어야 한다는 진리를 차 한 잔이 알려줍니다.

손에 와 닿는 온기가, 코로 스며드는 향기가,

입술에 와 닿는 찻잔의 감각이,

목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느낌이,

온 몸 가득 퍼지는 따뜻함이,

바깥세상으로 흩어져 있던 주의를 지금 이곳의 나에게로 다시 모아줍니다.

지금 내가 온 몸의 에너지가 온 마음의 에너지로 집중하여야 할 만큼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소중한 것에 초점이 맞춰지면 주변의 것들은 저만큼 물러가며 사라지거나 흐릿해집니다.

불안, 염려, 생각이 만들어낸 온갖 허상들이 힘을 잃습니다.

내가 왜 쓸데없이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고 있었나, 의아해집니다.


며칠 남지 않은 1월이 마음을 바쁘게 합니다.

마쳐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멈추어보면 어떨까요?

기계적인 행위들에서 빠져나와,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지금 이곳의 생생함을 느끼며 마음이 일러주는 방향의 문을 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