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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낙엽 한 장 대지로 돌아올 때마다

HIT 446 / 정은실 / 2012-11-07


일할 때 쓰는 책상을 며칠 전에 거실 창 바로 앞으로 옮겼습니다.

오전에는 햇살에 눈이 부셔 PC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 좀 피곤하지만,

바로 3미터 남짓 앞에 서있는 나무들, 가을바람, 하늘을 마주 보고 싶어서

작은 불편함은 눌러버렸습니다.


책상에 앉으면 바로 창밖으로 측백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대추나무가 나란히 보이고

저만큼 앞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나무들마다 지난봄 잎을 피우던 시기도 다르더니,

단풍 드는 모습도 다르고 잎을 떨어뜨리는 모습도 다릅니다.


내 눈길을 가장 당기는 나무들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감나무와 대추나무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7년 전 6월에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창밖을 가득 채우며 싱그럽게 흔들리던 그 두 나무들 때문입니다.

모든 나무가 사시사철 날마다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매일 창밖으로 그 두 나무에 눈도장을 찍으며 배웠습니다.


해마다 5월이 되어서야 느릿느릿 잎을 피우는 대추나무는

요 며칠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우수수 낙엽 비를 내리더니

해마다 이맘때처럼 어김없이 허허로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몇 밤 지나지 않아 바람이 지나가도 흔들릴 잎도 없이 고요해질 것입니다.


며칠 전 시골에서 봤던 감나무들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열매만 맺고 있었는데,

아직 우리 아파트 창밖 감나무 잎은 할 일이 남았나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몇 개 남은 열매를 안고

이따금 날아오는 새들의 부리 짓에 흔들립니다.


강의도 미팅도 없었던 오늘,

점심을 먹고 한참 산책을 했습니다.

한 뼘씩 하늘이 넓어지는 만큼 낙엽으로 덮여가는 산책길에서

낙엽 비에 발걸음을 멈추고,

명명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의 어우러짐에 감탄하고,

시작도 과정도 끝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모습을 배우고,

편안히 걸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감사하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행복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지인의 안부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바로 이맘때 같이 깊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던 지인의 글이었습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글을 읽으며

오래 전 그날 그 시간이 지금 이곳에 떠올랐습니다.


... 그때,

... 장작난로에 불을 지폈지만, ... 두꺼운 방석을 깔고 무릎담요를 덮어야했던 그곳,

... 물빛이 참 맑았던 산속 개울가 허술한 나무집,

... 그래도 같이 둘러앉았던 사람들이 있어서,

... 서로 열었던 마음이 있어서,

... 그 마음을 잡아주었던 ‘나’의 꿈과 ‘우리’들의 사랑이 있어서 참 따뜻했습니다.


늦가을은 마법의 시간입니다.

떨어지는 잎만큼, 두 장 남은 달력만큼, 지나가버린 한 해의 일만큼,

외부의 것들은 점점 가벼워지고 건조해지는데,

내부의 것들은 점점 차오르고 촉촉해집니다.

떨어지고 있는 화려한 잎들 사이로 가지가 드러나듯,

우리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던 지울 수 없는 삶의 이야기들이

문득문득 가슴을 타고 예고 없이 떠오릅니다.


이 가을,

낙엽 한 장 대지로 돌아올 때마다,

나와 그대 가슴에,

잊고 있던 행복한 추억 한 자락,

눈물 나는 감사 하나,

첩첩이 접어놓았던 꿈 한 조각,

깊은 축복의 기도 하나가,

마법처럼 피어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