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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어떤 메모 <빗소리>

HIT 638 / 정은실 / 2014-09-23

 

요즘 한겨레에 글을 쓰고 있는 여성학 강사 정희진님의 글입니다.

글이 참 좋아서, 남겨두고 싶기도 하고 나누고 싶기도 해서 이곳에 올립니다.



빗소리


비가 내린다. 그는 자연의 대사(大使), 절대자다. 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홍수, 생계, 통증까지 인간의 삶을 총괄한다.


내 관심사는 비가 어디에 떨어지는가이다. 그리고 빗소리. 빗소리는 비의 지문이다. 비가 닿는 곳에 따라 빗소리는 만 가지 소리를 낸다. 이슬비, 폭우, 비바람... 비의 종류는 하늘이 관장할 일이고 빗소리의 다양함은 인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빗소리가 소음일지 실로폰 소리가 될지는 비가 닿는 곳이 결정한다. 양철 지붕, 널어놓은 옷, 물의 표면, 황톳길, 무성한 나뭇잎, 창문, 한적한 도로, 복잡한 도로에 따라 다르다.


내 생각에 <노란 우산>은 빗소리에 집중하는 책이다. 뒤표지에 빗소리를 주제로 한 음악 시디가 있다. 글자는 하나도 없는 그림책이다. 산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때도 출간 8개월 만의 초판 4쇄본이었다. 이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이후 여러 곳에서 재출간되었고 상도 많이 탄 명작이다. 책 표지는 회색 바탕에 노란 우산 하나. 회색이 이렇게 예쁘고 눈이 맑아지는 색이었던가 감탄하게 된다.


내용은 집에서 거리로 막 나온 우산 한 개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늘어나 마지막엔 우산이 거리를 메운다. 우산 위의 시점이라, 여러 개의 우산이 활짝 핀 꽃처럼 보인다. 우산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비슷할 것이다. 비의 시작은 같다는 의미인 것 같다.


<노란 우산>은 그림 자체가 이야기지만 이 책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읽기 나름이 아니라 다시 쓰기 나름인 책, 좋은 책이다. 권력관계에 관심 많은 나는 ‘산하’(傘下, 우산 아래)를 주제로 글을 쓰겠다. 세력의 관할(핵우산, 산하기관...). 우산 안팎의 쟁투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사이가 좋지 않거나 몸이 다른 사람이 우산을 같이 쓰면 고역이다. 우산 밖으로 밀치는 사람, 안에서 죽이는 사람, 그런 세상사가 싫어 비 맞으며 걷는 사람. 비 맞는 뚜벅이가 멋있어 보이지만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당대의 명언은 신영복의 “연대는 우산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같이 걷는 것”일 것이다. 영원한 ’비와 당신‘의 이야기다.


아, 어떻게 살아야하나. 우산 속에서 다툴 것인가, 갖가지 우산 사이를 이동할 것인가, 처음 들어보는 빗소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비가 피할 수 없는 구조라면 빗소리는 구조에 대한 개인의 반응이다. 그래서 비온 뒤 상황은 동일하지 않다. 우후의 죽순도 있지만 썩어버리는 화분의 싹도 있다. 비를 맞는 조건이 중요하다. 여름 산행이 겨울 산행보다 동사할 확률이 큰 것은 여름산은 나무가 젖어 불을 땔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 고통만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정의롭지 못해서이다. 고통은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모든 경전의 주제가 고통, 번뇌인 이유다. 가해자, 강자, 주류의 시선은 고통을 준다. 연대와 공감이 어려운 이유는 ‘낮은 데로 임한 다음 저 높은 곳을 향해’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보다 빗소리처럼 사건보다 사건 이후가 중요하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정부의 대처가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는데 세월호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듯이, 그 반대다. 세월호 특별법은 첫 번째 빗소리인 셈인데, 간신히 이어지는 가늘고 가쁜 숨소리마저 도려내는 듯 조용한 잔인함만 들린다. 회피와 침묵. 비는 계속 내리는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다짐할 필요도 없다. 비처럼 세월호도 삶의 일부다. 어두운 이야기도 남의 일도 아니다. 누구나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베갯잇을 적시게 되는, 보고 싶은 이들이 있지 않은가.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눈물과 함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게 하라.


바다에 내리는 빗소리는 모호하다. 그러나 진도 바다의 영혼들은 듣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역사에 새길 빗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 하는, 타닥타닥 존재감 있는 소리.